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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먼 행성 - 오민석

by 해선 잠보 2024. 8. 26.

먼 행성 - 오민석

벚꽃 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 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 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 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잘린 체 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 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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