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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길에서 - 김용택

by 해선 잠보 2024. 8. 23.

길에서 - 김용택

앞산 뒷산

오월 푸른 산을 바라보건대

그 사이 앞내가 푸르르고

그 안에 살아온 내 몇 해가

하루해 같아

오늘 해는 유난히 짧고

해 지는 산마루에 눈물이 걸려

반짝 비치는구나

무엇을 아끼고

무엇에 정 붙여 살았느냐

맑은 바람은 이리 부드럽게

야윈 뺨을 스치는데

내게 오고 가고 무엇이 머무느냐

생각하면 누구나 살아온 이 세상이

피눈물을 쏟던 설운 굽이인데

찔레꽃 떠내려가는

어느 물굽이에서

내 서러움만 가려서

떠 보이겠느냐

철이 들면서 나는

앞산 빈 밭 거름 더미만 보아도 정에 겨웠고

홀로 밭매는 어머니만 먼 데서 보여도

밭이 너무 커서 서러웠다

어디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저녁 길

동구에 들어서서

어머님 등불만 보여도

나는 늘 가슴이 새롭게 뛰고

발길이 부산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 부르며 마당에 들어서면

오냐 내 새끼 인자 오냐, 문을 열면 환한 어머님 불빛에

나는 늘 행복해 웃었다

홀로 풀짐 지고 산굽이 돌아오는

아버지만 길에서 만나도

강 길이 너무 적막하여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강변에 풀꽃만 피어도

강물에 눈만 내려도

강변을 거닐며,

꽃 곁에 앉아

눈 사라지는 강가 바위에 앉아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정자나무 잎 피고

그 아래 앉아

소쩍새 이 산 저 산에서 울고

둥근 달이 떠오르면

나는 사람 하나 이 세상을 떠난 자리가

그렇게도 넓어

긴긴 밤 달 져 내 방에

새벽어둠 들 때까지

사랑에 목이 메어

물소리를 따라다니며

바위 뒤에 숨어 혼자 울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이냐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이웃들의 농사에

내 손이 희어서 부끄러웠고

뙤약볕 아래 그을린 농사꾼들의

억울한 일생이

보리 꺼시락처럼 목에 걸려

때로 못밥이 넘어가지 않아

못 드는 술잔을 들곤 했다

논밭에 땀 흘리지 않고

흙 무서워하는 손으로 시를 쓰고

밥을 퍼먹으며

그들의 아들딸들을 가르치며

나는 가르침에 괴로웠다

지던 해 졌구나

눈 내리깔아 땅을 보건대

우리 땅 어디에는

아픈 흔적들이 몸을 쑤시고

갈 수 없는 곳에 머물러

몸과 마음이 갑갑하구나

세상을 배우면서 나는

갈라진 내 조국에 눈뜨며

결코 쓰러질 수 없는 사랑을 배웠다

땅 가까이 헤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땅에 만나야 할 것들이

한 치 땅 위로 푸르게 설렌다

내 세월도 한 겨레의 세월과 같아

세월은 많은 것들을 용서하고

많은 것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한 번 왔다 가는 이 세상

사람이 살면은 얼마나 살며

살아 또 무엇을 이루겠느냐

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에

비겁하지 않으련다

이 세상 맨땅을 디디려

이 세상 허망한 데를

다 돌아다니다가

다시 서니 앞산 뒷산 내 강토가

내 몸에 가깝고

그 안에 작은 들에서

모내는 사람들의 몸짓이 바쁘게 보이는구나

내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반달만큼 남은 논배미에 들어선다

내 딛어 발 빠진, 물려받을 농토가 너무 서럽고

인간 만사 세상인심이

땅에 너무 야박하나

땅은 유구하고 곡식 또한 그렇다

우리 진정한 사랑의 시선이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유이듯

나는 이 땅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이 한 짐 짐짐의 무거운 사랑

아, 사랑의 가벼움이여, 자유여

자유를 찾으며 울먹이는 흙 속에

줄모를 꽂는다

모를 다 내고 논두렁에 서 보니

모들이 나란히 어여쁘고

나도 오랜만에

저녁 한 끼 밥값을 한 것 같구나

아버님은 벌써 풀 한 바작을

못밥같이 고봉으로 수북이 쌓으셨구나

삶이여!

저 위에 무엇을 더하고 덜하겠느냐

아버님 풀짐에 나비 두어 마리 따라 날고

강변 풀꽃들이 더욱 다정히 피어나며

아버지 가시는 길에 길이 따른다

하얀 길을 가운데 두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정답게

수고했다 마중하며

마을로 길을 내어 주고

모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마을 길로 접어드는구나

내 흉년의 저 길을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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