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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by 해선 잠보 2021. 8. 12.

 

그런 저녁이 있다 - 나희덕 

 

저물 무렵

무심히 어른거리는 개천의 물무늬며

하늘 한구석 뒤엉킨

하루살이 떼의 마지막 혼돈이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바라보려 한다.

 

뜨거웠던 대지가 몸을 식히는 소리며

바람이 푸른 빛으로 지나가는 소리며

둑방의 꽃들이

차마 입을 다무는 소리며

어떤 날은 감히 그런 걸 들으려 한다.

 

어둠이 빛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나무의 나이테를

내 속에도 둥글게 새겨넣으며

가만 가만히 거기 서 있으려 한다.

 

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한 어둠 하나

옹이로 박힐 때까지

예전의 그 길, 이제 끊어져

무성해진 수풀 더미 앞에 하냥 서 있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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