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by 해선 잠보 2021. 9. 2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는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영혼아,

무엇을 찾는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멀미 -이해인  (0) 2021.09.24
봄날에 ​​​- 나태주  (0) 2021.09.24
4월 아침 ​​​- 김상아  (0) 2021.09.24
중년의 가슴에 4월이 오면​​ - 이채  (0) 2021.09.17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0) 202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