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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순천만 갈대숲 - 복효근

by 해선 잠보 2023. 6. 6.

순천만 갈대숲 - 복효근

순천만에 와서

소나무나 참나무숲처럼 갈대들이,

그 연약한 갈대들이 당당히 숲이라 불리는 까닭을 알겠다

그 줄기가 튼튼해서가 아니었다

나이테가 굵어서가 아니었다

바람이 몰려올 적마다

각기 안테나를 길게 뽑아들고

바로 곁에 서 있는 그대를 천리처럼 안타까이 부르는 아득한 몸짓

칼바람에 앞엣 놈이 넘어지면

뒤엣 놈이 받아서 함께 쓰러지며

같은 동작으로 다시 일어서는 탄력의 떼춤을 보았다

그러나 갈대가 한사코 꺾어지지 않기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갈대는 갈 때를 안다

엄동의 긴 밤을 청둥오리떼 날아들자

스스로 제 몸을 꺾어

털스웨터처럼 갈꽃자리를 깔아주는 것 보았다

그 멀고 긴 쓰러짐의 힘이

이듬해 다시 숲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리라

혼자서 겨울 먼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순천만에 와서 비로소

나를 받쳐준, 혹은 함께 쓰러지던 무수한 허리들이 그리워

휴대전화 안테나를 길게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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