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다방 - 류근
보살이 찻잔을 들고 나선다
두 개의 법륜을 갖춘 클래식 스쿠터 뒷자리에
반가사유의 자세로 올라앉아
고요히 사바의 굽은 길을 바라본다
비가 내릴 때마다 아랫도리를 적시던 집들이
모처럼 잘 마른 햇살 아래 허벅지를 내다 건다
정토부동산 앞 지날 때 한눈 흘기던
애꾸눈 사내의 목덜미가 맨드라미 같다
법륜의 속도에 겨워 펄럭 들춰지는 스커트 자락조차
여기선 다 보시가 된다
법열의 세계를 훔쳐보는 저 무구한 눈들 뒤에
웅크려 빛나는 불성이야말로 진흙 같은 세상 밝히는
천진불의 본래 자리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므로 무릇 법이란
삼천대천세계에 우산살처럼 펼쳐져야 하는 것
처음 화류종단의 계를 받을 때
연비보다 아프게 살에 박히던 깨달음을
보살의 나이테는 뜰 앞의 잣나무처럼 키워왔다
빈 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왔으니
몸으로 짓는 인연으로 삼생의 업보를 다 씻으리라
굳게 원력 세운 초발심의 경계 허물지 않았다
불멸장의사 지나 반야미용실 지나
마침내 탄드라모텔 108호실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짐짓 들숨과 날숨 사이에 버티는 번뇌 따위
찰나에 수미산까지 번지는 망상 따위 본디 공한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연꽃 하나 피우는 일로 날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몸으로 세운 뜻 거듭 깨우며
보살이 찻잔을 들고 나선다
굴려도 굴려도 닳지 않을 금강의 진신 법륜이
스커트 자락 깊숙이 사리처럼 빛나고 있다는 경문을
중생들의 불심은 지폐 몇 장 불사르는 일로 확인하지만
보살의 법륜은 구르고 굴러 오늘도
비와 햇살과 구름의 날들을 건너
클래식 스쿠터 배기량으론 꿈조차 따를 수 없는 먼 길
피안으로 피안으로
티켓도 없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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