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나 - 나희덕
닭과 나는
털이 뽑힌 닭과 벌거벗은 나는
함께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오그라든 팔로도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듯
말라빠진 다리로도 걸어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듯
닭에게 두 날개가 있다면
나에겐 두 유방이 있지요
퇴화한 지 오래이거나
조금은 늘어지고 시들긴 했지만
날개와 유방은
우리를 잠시 떠오르게 할 수 있어요
시간을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는 힘이지요
닭과 나는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고
서로의 손발이 되어 주고
서로의 바닥이 되어 주고
서로의 방주가 되어 주고
서로의 뮤즈가 되어 주고
서로의 비유가 되어 주고
나의 머리가
점점 닭벼슬에 가까워져 갈 때
닭의 목은
점점 나의 목처럼 굽어져 가지만
닭과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
서로를 태우고 앉아 같은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 먼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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