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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가을날 - 이병률

by 해선 잠보 2024. 12. 6.

가을날 - 이병률

 

이사를 한다

나도 모르는 이사를 하고

싼 적 없는 이삿짐을 푼다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이사

명치께에서 명치 끝으로의 이사

생각에서 생각으로의 이사

이상하게 그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그 가을이었다

낯선 곳에다 짐을 내려놓고는

잠깐 자려고 눈을 붙였다가 떴는데

창문 바깥 해바라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놀랐다

 

벌써 저녁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해바라기가 잠든 나를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찾기 위해 일어나 앉아서는

조금 걸어야 한다고 마음으로만 생각했다

 

해는 없고 해바라기만 떠 있었다

마음에 파고들어와 아프게 드나드는 그 감정이 하도 쓰르르해서

나는 나를 건드려 발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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