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판각 기행 - 문정영
그녀에게 새긴 시간은 평면이었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바다였다
깊어서 평면으로 눕고 평평하게 말하기를 바랐다
바다는 산소를 만드는 식물성 프랭크톤으로 산다고, 그녀는 붉은 입술로 아주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눈으로 읽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듯
바다의 눈꺼풀을 덮으면 수평선이 지워졌다
바다는 오래 살아 있는 것들을 밀물판화에 새겼다
그녀와 내가 함께한 어제는 짜디짠 판각이었다
누군가 들여다보아도 거둘 것이 없는
찍어도 찍혀 나올 것이 없는 탄소발자국같이
지금까지의 여행을 지워가고 있다
바다는 이제 먹을 갈 깊이가 없다
썰물이 밀려가야 할 이유를 새길 때까지 판각을 다듬는
눈꺼풀로 바다를 내렸다 올리는 우리는
이번 생의 초보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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