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서 온 편지/김영서
1.
먹으로 그려진 세상에 여백이 너무 많은 걸까
길 끊겨진 곳에 지푸라기 하나 솟아있다
아궁이 속 검댕이 긁어 먹으로 삼고
길 그리려다 손끝 시려 붓 자국 스쳐
지푸라기가 폭설을 내리게 했다면
전설처럼 눈 소복하게 내렸던 날
아궁이는
불꽃이 사그라질 때쯤
하얗게 튀밥을 쏟아냈었다
2.
눈 녹으면 바닥이 드러나고
날짐승 날아들어 헤집는 것이
태반을 쏟아놓은 것을 아닐까 했었다
하나하나 뾰족하게 드러날 때
배꼽모양으로 녹아 들어가는 눈을 보고
그동안 움켜잡고 살았던 것이
탯줄인줄 알았다
지난 여름부터
빗물로 씻어보고
바람으로 쓸어 보고
안쓰러워 눈으로 덮어 보기도 했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배꼽부터 눈을 녹이고 있는 게다
3.
몇 날 폭설 내리고
길 끊어 아무도 오지 말라 하더니
세상이 온통 꽃밭이다
반쯤은 삭아서 흙이 된 삭정이
꽃으로 피었는데
낯설지 않은 것이
나도 한때 설원에서 살았었나 보다
잔솔가지와 거기서 놀던 바람
구들 밑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인가로 내려 온 내가 그리운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