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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by 해선 잠보 2023. 6. 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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