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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글

그 집 - 이승희

by 해선 잠보 2024. 11. 21.

그 집 - 이승희

 

그 집에 가면 물속에서 라디오를 들을 수 있어. 물을 지나온 말들은 한없이 다정해서 나는 보이는 것보다는 들리는 것을 믿게 되었고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 무수한 손가락을 가졌고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한꺼번에 혹은 차례로 들어오는 말. 어떤 말들은 나를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그런 말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좋았어.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말 떨어져도 빛나는 말. 나는 그런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 보지 못했어. 이를테면 같이 가자 거나 또 보러 올게 언제든 만나도 좋아 같은 말이었는데 그런 말은 언제나 한낮 같았어. 낮잠 같아서 이미 도망쳐 도착한 곳인지 이제부터 도망쳐야 할 곳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태몽처럼 흘러가는 물의 방향은 아름다웠어. 라디오에선 오래된 노래들이 흘렀어. 기타 소리가 들리고 드럼 소리가 둥둥거리고 아주 천천히 내게로 걸어오는 당나귀의 발굽 소리와 둥근 눈, 새들의 날갯짓 소리, 물속에서 만나는 폭우.

 

아무것도 해석할 필요가 없는 그런 꿈, 가끔 물속으로 햇살이 비쳐 들곤 했는데 멀리서만 반짝여서 좋았어. 그 먼 곳에서 내가 사랑했던 버드나무는 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혼자 보낸 생일이 다 지나가고도 혼자일 때 나는 꿈속에서도 쫓겨나는 꿈을 꾸곤 했어. 그 집은 멀지 않아서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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