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11556 낙(落) - 박준 낙(落) - 박준그날 아버지가 들고 온 비닐봉지 얄랑거리는 잉어 잉어 입술처럼 귀퉁이가 헐은 파란 대문 집 담벼락마다 솟아 있는 깨진 유리병들 월담하듯 잉어는 내가 낮에 놀던 고무대야에 뛰어들고 나와 몸집이 비슷했던 잉어 그날따라 어머니는 치마 속으로 나를 못 숨어들게 하고 이불을 덮고 끙끙 앓다가 다 죽기 전에 손수 배를 가르느라 한밤중에 잉어 내장을 긁어내느라 탯줄처럼 길게 끌려내려오던 달빛 "당신 이걸 고아먹어야지 뭐하려고 조림을 해" 다음날 아침 밥상에 살이 댕댕하게 오른 그러니까 동생 같은 2024. 9. 2. 생활과 예보 - 박준 생활과 예보 - 박준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2024. 9. 2. 나란히 - 박준 나란히 - 박준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 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2024. 8. 30. 단비 - 박준 단비 - 박준올해 두 살 된 단비는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았다 딸이 넷이었고 아들이 둘이었다 한 마리는 인천으로 한 마리는 모래내로 한 마리는 또 천안으로 그렇게 가도 내색이 없다가 마지막 새끼를 보낸 날부터 단비는 집 안 곳곳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밤이면 마당에서 길게 울었고 새벽이면 올해 예순아홉 된 아버지와 멀리 방죽까지 나가 함께 울고 돌아왔다 2024. 8. 30. 메밀국수/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메밀국수/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 2024. 8. 30. 뱀사골 - 박준 뱀사골 - 박준가장 오래 기억하게 되는 꿈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대신 꾸어준 태몽일 거라며 당신이 웃었습니다 늙은 나무에 하나 열려있는 복숭아 열매를 따낸 것이 내 태몽이었다고 하자 솔향기 짙은 바람이 어디서 훅 불어든 일이 자신의 태몽이었다며 당신은 한 번 더 웃어보였습니다 2024. 8. 30. 쑥국 - 박준 쑥국 - 박준방에 모로 누웠다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쑥을 뜯으러 가는 동안 나는 저녁으로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 내가 남도에서 자란 얼굴이 검고 종아리가 두꺼운 사내였다면 된장 대신 도다리 한 마리를 넣어 맑게 끓여냈을 수도 있다 낮부터 온 꿈에 그가 보였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것에 서운하다 서향집의 오후 빛은 궂기만 하고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워 신발을 길게 바닥에 끌며들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2024. 8. 30. 바짝 붙어 서다 - 김사인 바짝 붙어 서다 - 김사인굽은 허리가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바짝 벽에 붙어 선다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고독한 바짝 붙어 서기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 서기차가 지나고 나면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천천히 다시 펴진다밀차의 바퀴 두 개가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기운 싱크대와 냄비들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목이 멘다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2024. 8. 29. 동생 - 박준 동생 - 박준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탕탕탕 뛰어 귓속의 강물을 빼내지 않으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밤에 소변보러 갈 때마다 강가로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입 속은 껍질이 벗겨진 은사시나무 아래에서도 더러웠고요 먼 산들도 귀울림을 앓습니다 강에 일곱이 모여 가서 여섯이나 다섯으로 돌아오던 늦은 저녁, 아이들은 혼나지도 않고 밥을 먹습니다 그때 여기저기 흘리던 밥풀 같은 걱정들은 금세 떠오르던 것이었지만요 한낮 볕들은 깊은 소(消)의 위와 아래를 뒤섞습니다 물은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어가기도 하고 근처 밭머리에 수수들은 잔기침도 멈추고 일어섭니다 며칠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아이들로 강가는 다시 분주합니다 북쪽의 바위 위에는 봉분도 올리지 못한 누이들의 무덤가처럼, 그새 푸르르.. 2024. 8. 29. 파주 - 박준 파주 - 박준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2024. 8. 29. 종암동 - 박준 종암동 - 박준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2024. 8. 29. 가족의 휴일 - 박준 가족의 휴일 - 박준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2024. 8. 29.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9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