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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 - 김성규 망향 - 김성규 세상에 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며칠째 치우지 못한 방바닥의 약봉지를 버리고병이 들어도 갈 곳은 없어내가 살던 옛집을 찾아아픈 몸으로 모르는 꽃길을 걸어 다니네걸어가다 보면 골목의 막다른 길뒤돌아 나가도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으니어느 곳으로 걸어가도 같은 길집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어고통도 희망도 없는 길걸어가다 보면 수없이 다니던 길어느 창문으로 아이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상처 난 팔꿈치에 연고를 바르듯그칠 때까지 노랫소리 듣고 있네아무도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이 없으니세상에 집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2024. 12. 4.
마당을 건너다 - 곽효환 마당을 건너다 - 곽효환  그 여름밤도 남자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여인들이 지키는 남쪽 지방 도시 변두리 개량 한옥어둠을 밀고 온 저녁 바람이 선선히 들고 나면외등 밝힌 널찍한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저녁상을 물린 할머니를 따라평상에 자리 잡은 누이와 나 그리고막둥아!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던 코흘리개 동생은옥수수와 감자 혹은 수박을 베어 물고입가에 흐르는 단물을 연신 팔뚝으로 훔쳐냈다안개 같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할머니는그날도 마작판에 갔는지 작은댁에 갔는지 모를조부를 기다리며 파란 대문을 기웃거렸고부엌과 평상을 오가는 어머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어둠이 더 깊어지면 할머니는 두런두런일 찾아 항구도시로 간 아버지 얘기를 했고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더 과묵해졌다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 2024. 12. 4.
질병통역사 - 강신애 질병통역사 - 강신애 모르겠어요처음 본 내게 당신 치부를 고백하다니 백미러로 핑크색 손톱과구릿빛 피부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죄훼손된 꿈,봇물 터지듯 펼쳐놓다니요 그건 발아래히비스커스 꽃을 바치며태양신 사원에서 고백해야 했어요 오늘은 관광 가이드내일은 의사에게낯선 지방, 병중의 신음을 번역하지만 우리는 모두 오지여서각자의 방언을 말할 뿐 나의 말들이 주구(呪具) 같은 상징으로다정한 운율로당신 마음을 어루만졌나요 내 이마에 바른 연꽃 향유가당신 가슴골의 딸기 아플리케가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대체 누가 우리 허기를 통역해주죠? 당신의 아픔, 나의 슬픔똑같은 환처인데 산비탈로 꼬리를 흔들며회색 원숭이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2024. 11. 29.
나도 사랑을 해봐서 안다 - 윤준경 나도 사랑을 해봐서 안다 - 윤준경 아무도너를 말릴 순 없다나도 사랑을 해봐서 안다떠나라, 너의 재산은 너의 사랑어떤 말도 너를 되돌려차가운 강물 위에 놓을 순 없다불같은 마음 하나로사막이건 섬이건 너는 가라그리고 행복하여라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사랑하는 나의간절한 기도일 뿐너의 사랑 9할이 슬픔이라는 걸사랑하면 할 수록 아프다는 걸말해주지 않을 수 없구나​칙칙한 겨울비에 등이 젖고아지랑이 봄 언덕에 피어오를 때목메도록 낡은 집, 어미가 그리울 것을​샨데리아 밝은 불빛, 초록의 화원에서도사랑은 상처인 듯 저려온다는 것을그래도 너는 갈 수 밖에 없다사랑은 타고야 마는 불말려도 너는 듣지 않을 것이다​나도 사랑을 해봐서 안다 2024. 11. 29.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 김사이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 김사이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햇살은 아무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뺏다 하고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은 방죽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는닭장촌, 정착지도 모르고 날아들었다가가로등 불빛에 타죽어가는 날벌레 목숨 같은오누이가 사랑을 하고 사촌오빠가 누이를 범해 애를 낳는 그곳온몸 짙푸른 얼룩을 감추기 위해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엄마가 얇은 시멘트 벽 옆집 남자랑 도망가 없어도어른이 되어가는 그곳수많은 세대들이 서너 개의 공동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그곳문밖에 버려진 작은 화초들, 으깨진 보도블럭에서 솟아나는 풀들바닥 틈 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간혹 보일.. 2024. 11. 27.
생강 - 손미 생강 - 손미  나는 생강처럼 지내두 마리 물고기가 등이 붙은 모습으로 등을 더듬어 보면생강처럼 웅크린 아이가 자고 있어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어둠 속에서 음마 음마물고기처럼 아이는 울고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려고파닥거리지나는 침대 끝에 몸을 말고 누워호밀밭의 파수꾼처럼아이를 등에 붙이고침대 끝에 매달려외계에 있는 동료를 불렀다 시는 써?동료가 물어서차단했다 나는 검은 방에 누워빛은 모두 어디로 빠져나갈까 생각하다가내 흰 피를 마시고커지는 검은 방에서깜깜한 곳에서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땅속에서 불룩해지는 생강처럼매워지는 등에서점점 자라는 생강처럼한 곳에 오래 있으면 갇히고 말아 2024. 11. 27.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 길상호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 길상호 베어 묶어 둔 빗줄기가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금낭화는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꽃가지가 휘었다​뒷산에서 잠시 내려온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헛기침에도꽃이 떨어져 깨질까 봐,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 봐,​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그 집을 나왔다​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2024. 11. 26.
루저 까마귀 - 최금진​ 루저 까마귀 - 최금진​우리가 누군 줄 알아도둑도 거지도 아닌졸지에 까마귀가 되어버린 심정이 어떤 줄 알아무엇이든 움켜쥐고 싶었으나 다 놓치고그저 아침부터 재수 없이 짖어대는세상 잡것이 된 사연우리는 거리에서 날아온 시커먼 부고장썩은 고기 냄새마귀, 까마귀까옥 까옥, 지옥을 응시하는 기분으로겨울 추위 속에 앉아 몸을 웅크릴 때마다살아있으나 죄짓는 기분이 어떤 줄 알아땅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가도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는시청 주변 상가로 모여드는떨거지들, 행려병자들, 패배자들우리가 누군 줄 알아우리는 하늘과 땅을 떠도는 도둑과 거지의 신멋과 낭만이 흐르는 세상 어디에서나카악 퉤, 재수가 없는마귀, 까마귀 2024. 11. 26.
전어 - 김신용 전어 - 김신용​참, 동전 짤랑이는 것 같기도 했겠다한때, 짚불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구워지던 것비늘째 소금 뿌려 연탄불 위에서도 익어가던 것그 흔하디흔한 물고기의 이름이 하필이면 錢魚라니―​손바닥만 한 게 바다 속에서 은빛 비늘 파닥이는 모습이어쩌면 물속에서 일렁이는 동전을 닮아 보이기도 했겠다통소금 뿌려 숯불 위에서 구워질 때,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그 구수한 냄새가 풍겨질 때.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위로하는그런 수상한 맛도 나지만, 그래, 이름은 언제나 象形의 의미를 띠고 있어​​살이 얇고 잔가시가 많아 시장에서도 푸대접 받았지만뼈째로 썰어 고추장에 비벼 그릇째 먹기도 했지만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는,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장바닥에 나앉아 먹는 국밥 한 그릇의, 그런 감칠맛이어서손바닥만.. 2024. 11. 25.
분실물 보관소 - 신용목 분실물 보관소 - 신용목​이곳은 텅 비었어, 아무것도 없는 방이라면이게 적당해.주무관이 건넨 명패에는 ‘진담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다.농담이죠? 나는 물었고진담이야!나는 주무관이 건넨 명패를 달지 않았다. 진담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덕분에 나는 승진했다. ​농담의 방에서 근무한다. 새로 온 인턴이 더워요, 그래서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하루가물속이었다.가자 지구가 독점하는 실적을 어떻게 가져오지? 믿어 봅시다.여의도를 용산을, 아니믿지 맙시다.​웃으며, 오늘도 슬프군요! 업무상그런 대화가……​상사는 설거지거리를 생산한다. 회의가 끝나면내 손은 수세미가 된다. 타이핑을 하면 자음을 닮은 비눗방울과 모음을 닮은 비눗방울이아니 세제 방울이머리 위에서 서로를 찾아다닌다. 마침,한 아이가 살해당했다는 농담이 .. 2024. 11. 25.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 남몰래 오줌을 누는 밤 - 안명옥​술을 마시고 늦은 밤집으로 돌아간다 참지 못할 만큼 오줌이 마려워걸음이 평소보다 급하다 오줌 마려운 것이,나를 이렇게 집 쪽으로 다급하게 몰고 가는 힘이라니!오줌이 마렵지 않았다면 밤 풍경을 어루만지며낮엔 느낄 수 없는 밤의 물컹한 살을 한 움큼움켜쥐며 걸었을 것을 아니 내 눈길이보이지 않는 어둠 저편, 그 너머까지탐색했을지도 모를 것을지나가는 사람들 없는 사이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오줌을 눈다오줌을 누는 것은 대지와의 정사 혹은내 속의 어둠을 함께 쏟아내는 일,다시 오줌이 마려워오는 순간이 오기까지내 속이 잠시나마 환해지는 일우두커니 서 있던나무가 부르르 떤다놀라워라,일탈의 쾌감이 내(川)를 이뤄이렇듯 밤의 대지를 뜨겁게 적실 수 있다니, 2024. 11. 22.
죽음이 참 깨끗했다 - 장옥관 죽음이 참 깨끗했다 - 장옥관 죽은 매미를 주웠다죽음이 참 깨끗했다 소리만 없을 뿐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했다 얼마나 머물다 간 걸까 내 귓바퀴 속​소리의 무덤을 만들고 사라진찰나를 향한 여백뿐인 삶그래서 그 가파른 울음소리, 짝퉁 비아그라 사서 박카스 아줌마 만나는 노인들처럼 갈급했던 걸까 돌아보니벚나무 둥치에 소복하게 달라붙은 허물들벗어놓은 몸이 고스란하다 그 아래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초침 멎은 검은 시간들 우듬지엔 아직도 푸른 불길 치솟는 울음소리저 울음 그치면 울던 그 자세 그대로 툭 굴러떨어질 것이다 플러그 뽑은 티브이처럼 깨끗한 죽음무밭에 서리 내리듯 녀석의 성(性)은 사그라질 게다 여운도 없이 여음도 없이 칼로 벤 자리나도 따라 바라본다녀석이 마지막 눈길 던졌던 그곳을 2024.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