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1556 입동 - 정끝별 입동 - 정끝별 이리 홧홧한 감잎들이리 소심히 분분한 은행잎들이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요 잎들 모아서리 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겠지요 2024. 12. 12. 수평선으로 시작하는 아침 - 이생진 수평선으로 시작하는 아침 - 이생진 문을 열면 저 구름 저 수평선 저것이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집을 나서면저 구름저 수평선저것이 옷을 주는 것도 아닌데 2024. 12. 12. 11월 - 추프랑카 11월 - 추프랑카 똥파리가 국화꽃에 앉았다벌도 아니고 나비도 아닌 것이 꽃을뒤적인다 꽃잎 한 장을 또 노오란 것을 감잎이 흔들리며 지나가고 한참 꽃을 뒤적이던 똥파리가가슴 모으고 고요하다 향기 저편이윽고스러져갈꽃잎 한 장의 숨은 그림이 저 가슴에도 고이는지 2024. 12. 11. 입동(立冬)에 부르는 노래 - 홍수희 입동(立冬)에 부르는 노래 - 홍수희 겨울이 오려나 보다그래, 이제찬바람도 불려나 보다선뜻 화답(和答) 한 번 하지 못하는벙어리 차디찬 냉가슴 위로조금 있으면희디흰 눈싸라기도아프게 불어 제끼려나 보다코트 깃을 여미고멀어지는 너의 등 바라보며쓸쓸히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나사랑은 소유가 아닌 까닭을모를 리 없는 죄 많은 가슴하, 연약한 미련장밋빛 뺨이 고운 그대여너무 쉽게 왔다가 너무 쉽게떠나 갈 그대여!다시 또 겨울이 오려나 보다오거든 다시 가려나 보다 2024. 12. 11. 12월의 공허 - 오경택 12월의 공허 - 오경택 남은 달력 한 장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되물어 보지만돌아보는 시간엔숙맥 같은 그림자 하나만덩그러니 서 있고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알고도 못함인지모르고 못함인지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채우려는 욕심만 열 보따리 움켜쥡니다내 안에 웅크린 욕망의 응어리는계란 노른자위처럼 선명하고뭉개도 뭉그러지지 않을묵은 상념의 찌꺼기 아롱지는12월의 공허작년 같은 올 한 해가죽음보다 진한 공허로벗겨진 이마 위를 지나갑니다. 2024. 12. 10. 12월은 - 하영순 12월은 - 하영순사랑의 종시린 가슴 녹여 줄 따뜻한 정이었음 좋겠다. 그늘진 곳에 어둠을 밝혀 주는등불이었음 좋겠다딸랑딸랑 소리에가슴을 열고시린 손 꼭 잡아주는따뜻한 손이었음 좋겠다바람 불어 낙엽은 뒹구는데당신의 사랑을기다리는 허전한 가슴 2024. 12. 10. 가을날 - 이시영 가을날 - 이시영잠자리 한 마리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종일을 졸고 있다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차가운 소나기가 가지를 후려쳐도옮겨가지 않는다가만히 다가가 보니거기 그대로 그만 아슬히 입적하시었다 2024. 12. 9. 바다 판각 기행 - 문정영 바다 판각 기행 - 문정영그녀에게 새긴 시간은 평면이었다문자를 읽지 못하는 바다였다 깊어서 평면으로 눕고 평평하게 말하기를 바랐다 바다는 산소를 만드는 식물성 프랭크톤으로 산다고, 그녀는 붉은 입술로 아주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눈으로 읽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듯바다의 눈꺼풀을 덮으면 수평선이 지워졌다 바다는 오래 살아 있는 것들을 밀물판화에 새겼다그녀와 내가 함께한 어제는 짜디짠 판각이었다 누군가 들여다보아도 거둘 것이 없는찍어도 찍혀 나올 것이 없는 탄소발자국같이 지금까지의 여행을 지워가고 있다 바다는 이제 먹을 갈 깊이가 없다썰물이 밀려가야 할 이유를 새길 때까지 판각을 다듬는 눈꺼풀로 바다를 내렸다 올리는 우리는이번 생의 초보자일 뿐이다 2024. 12. 9. 시시한 비망록 - 공광규 시시한 비망록 - 공광규 돈이 사랑을 이기는 거리에서나의 순정은여전히 걷어차이며 울었다 생활은 계속 나를 속였다사랑 위해담을 넘어본 적도 없는 나는떳떳한 밥 위해 한 번도서류철을 집어던지지 못했다 생계에 떠밀려여전히 무딘 낚시대 메고도심의 황금강에서요리도 안 되는 회환만월척처럼 낚았다 자본의 침대에 누워자존심의 팬티 반쯤 내리고엉거주춤 몸 팔았다항상 부족한 화대로시골에 용돈 가끔 부치고술값 두어 번 내고새로 생긴 여자와 극장 가고혼기 넘긴 친구들이 관습과 의무에 밀려조건으로 팔고 사는 결혼식에열심히 축의금을 냈다 빵이냐 신념이냐 물어오는 친구와소주 비우며 외로워했다나를 떠난 여자 생각하다가겨울나무로 서서 울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이런,시시한 비망록이라니. 2024. 12. 6. 가을날 - 이병률 가을날 - 이병률 이사를 한다나도 모르는 이사를 하고싼 적 없는 이삿짐을 푼다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이사명치께에서 명치 끝으로의 이사생각에서 생각으로의 이사이상하게 그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그 가을이었다낯선 곳에다 짐을 내려놓고는잠깐 자려고 눈을 붙였다가 떴는데창문 바깥 해바라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놀랐다 벌써 저녁이 넘어가고 있었다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정말로 해바라기가 잠든 나를 불쌍하다는 듯내려다보고 있었다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찾기 위해 일어나 앉아서는조금 걸어야 한다고 마음으로만 생각했다 해는 없고 해바라기만 떠 있었다마음에 파고들어와 아프게 드나드는 그 감정이 하도 쓰르르해서나는 나를 건드려 발기시켰다 2024. 12. 6. 닭과 나 - 나희덕 닭과 나 - 나희덕 닭과 나는털이 뽑힌 닭과 벌거벗은 나는 함께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오그라든 팔로도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듯말라빠진 다리로도 걸어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듯 닭에게 두 날개가 있다면나에겐 두 유방이 있지요 퇴화한 지 오래이거나조금은 늘어지고 시들긴 했지만 날개와 유방은우리를 잠시 떠오르게 할 수 있어요시간을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는 힘이지요 닭과 나는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고서로의 손발이 되어 주고서로의 바닥이 되어 주고서로의 방주가 되어 주고서로의 뮤즈가 되어 주고서로의 비유가 되어 주고 나의 머리가점점 닭벼슬에 가까워져 갈 때닭의 목은점점 나의 목처럼 굽어져 가지만 닭과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서로를 태우고 앉아 같은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 2024. 12. 5.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이장욱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 이장욱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영원을 잃어버렸다.자꾸 잃어버려서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원래 그것이 없었다는단순한 사실을 떠올렸다.나는 이제 달리지 않고 누워 있다.원인이 사라진 풀밭에 자전거를 버려두었다.바퀴의 은빛 살들이 빛나는 강변을 바라보며서로에게 불가능해지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풀밭에는 아주 작은 음악들의 우주가 펼쳐져 있고그것을 아는 것은 쉽다.그것을 진실로 느끼는 것은 모로 누운 사람들 뿐이지만누구의 왕도 누구의 하인도 아니어서외롭고 강한 사람들뿐이지만은륜이 떠도는 풍경을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햇빛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물의 일렁임에도 인과관계가 있고달려가다가 멈추어 서서 문득 잔인한 표정을 짓는 일에도원인과 결과가 있겠지만 오늘은 기도.. 2024. 12. 5. 이전 1 2 3 4 5 ··· 9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