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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 안도현 입추 - 안도현  이 성문으로 들어가면 휘발유 냄새가 난다 성곽 외벽 다래넝쿨은 염색 잘하는 미용실을 찾아나서고 있고 백일홍은 장례 치르지 못한 여치의 관 위에 기침을 해대고 있다 도라지꽃의 허리 받쳐주던 햇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기별이다 방방곡곡 매미는 여름여름 여름을 열흘도 넘게 울었다지만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왜가리는 여태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한성부 남부 성저십리(城底十里)의 참혹한 소식 풀릴 기미 없다 시 두어 편 연필 깎듯 깎다가 덮고 책상을 친다 오호라, 녹슨 연못의 명경을 건져 닦으니 목하 입추다​ 2024. 11. 4.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너의 하늘을 보아​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가만히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가닿는너의 하늘을 보아 2024. 11. 4.
입추(立秋) - 박인걸 입추(立秋) - 박인걸 깨진 낮달은따라오는 태양에 밀려나고이글거리던 여름도가을 소식에 짐을 꾸린다. 잠시 머무르다떠나야 할 때는 말없이배역을 마친 후무대 뒤로 사라지는 계절 반백의 이마위로석양 그림자가 드리우고젊은 날의 추억은아득히 멀어져 간다. 억세 꽃잎에 물든 가을텅 빈 허전한 가슴풀벌레 처량한 노래아! 나도 늙어가고 있구나.​ 2024. 10. 31.
십자가의 길 - 김귀녀​ 십자가의 길 - 김귀녀​황사가 담벽을 돌아가는작은 어촌 앞마당대나무에 꽂힌 채깃발로 변한 오징어골고다 십자가주님의 아픔을 닮았다귀에 못이 박히도록보고 읽고 들어도욕심의 저울 위에 올리면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부족한 믿음넓은 길 걸어가는죄인임을 고백하며욕심에 젖은 입술 깨물어 본다부족함 없이행복하게 살고 있지만늘 쫓기는 듯한 마음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던그분을 떠올리며어촌 앞마당 대나무에 꽂힌 오징어처럼십자가의 길 침묵으로 걷고 싶다​ 2024. 10. 31.
가을편지 1 - 이해인 가을편지 1 - 이해인​여름의 폭염 속에단련된 시간잘 익은 나의 인내로가을을 기다렸어요​서늘한 바람 안고 하늘을 보면너무 기뻐서가슴에 통증이 일고기침이 나요​당신과 함께또 한 번의가을을 보낼 수 있어행복합니다​마음이 순해지는 이 가을우리는다시 사랑을 시작해야죠먼대 있는 사람에게도웃음을 날리고용서하기 힘들었던 사람도용서해야지요​ 2024. 10. 30.
입추가 오면 - 백원기 입추가 오면 - 백원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그래 봐야 양력 팔월 칠일이면보따리 쌀 준비를 해야 되는데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동네 개가 놀라 짖는단다입추는 입동이 올 때까지가을이란 이름표 달기 위해첫 문을 여는 날 낮에는 늦더위가 발악하지만밤이 오면 서늘한 바람에너나 나나 미소 지으며 잠을 잔다입추가 오면옥수수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축가를 부른다 온 세상사람 함께 모여아름다운 화음의 노래를 부른다​ 2024. 10. 30.
붉은 십자가의 묘지 - 김경민 붉은 십자가의 묘지 - 김경민​어두운 경인 고속도로 달려가면먼 데 벌판 가득히 빛나는교회 첨탑 위의 붉은 십자가차 안의 사람들 반은 졸고반쯤 죽은 사람들 얼굴 위에무덤처럼 즐비하게 떠오르는붉은 십자가의 교회어딘가 제 정처를 향해달려가는 버스 양편 어둠에서일정하게 다가와 이내 스쳐가는저 빈혈의 가등 사이로쇠사슬과도 같이 버스와 나를 끌고세상이란 거대한 묘지를 향해달려가는 붉은 십자가의 무덤 2024. 10. 29.
지금도 고통의 십자가에 달려 계신 주님 - 김성림 지금도 고통의 십자가에 달려 계신 주님 - 김성림​사랑이신 주님!당신은 지금도 힘든 그 고통십자가에 매달려 왜 고통의 절규의함성 부르짖습니까?​이천 년 전 그렇게 피땀 흘리시면서골고타 언덕 위에 매달리신 그곳에서피눈물의 함성을 왜 아직도 이 민족에절규하고 계시나요.​지금도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당시 양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어여쁜 당신의 성심에 찔린창의 고통을 왜 아직도 받고 계십니까?​지금도 당신을 고통스러운십자가 위에 매달리게 하여당신…… 2024. 10. 29.
말씀 - 박수현 말씀 - 박수현​수많은 십자가를 보았다산 딸 나무가 밀어 올린 작은 십자가들몸 구석구석얼마나 많은 어둠을 밟고 왔는지한 때 사랑이었고 배반이었고 치욕이었던 것들이나무 우듬지마다 가득하다사함 받지 못할 죄가 많아서인지네 장의 흰 꽃차례마다 담긴 울음이 너무 환해지구 저편이 또 맑게 물든다한번쯤, 지나쳐 온 어둠 따윈 내팽개쳐도 된다고입술이 휘도록 자꾸 내 귀에속삭이는 검은 중절모 눌러 쓴 저 말씀​이곳 유대인 마을은 지금 산 딸 나무 꽃 천지다 2024. 10. 28.
연꽃 아리랑 2 - 한정원​ 연꽃 아리랑 2 - 한정원​임이 있어 사랑을그립니다.임이 있어 보고픔도하늘에 노래합니다.어제도 오늘도그리고 언제나 영원토록연잎 가득한 연못에서어랑아리 어히아리아리어리 어허어랑아리랑 연꽃 사랑 그림가슴에 채우렵니다. 2024. 10. 28.
어떤 출토 - 나희덕 어떤 출토 - 나희덕​​​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 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 타닥 타고 있는 불꽃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 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 움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2024. 10. 25.
재즈 아리랑 꽃(3) - 한정원 재즈 아리랑 꽃(3) - 한정원​하나에서 열이 된 언어우주 작은 모래알에서천공을 나는 은하수 별똥들언어의 얼굴들과 시공의 색채들이달라도 그 안에 품고 사는 모든 씨앗들은하나에서 천으로 가도 여전히동일한 공간과 모습들백만 년의 시공간이 지나고 있어도재즈아리랑에 품어나고 있는어허아리 어히아리 어랑아리어히둥둥 어리 아리랑은또 다른 백만 년을 흐르며 노래한다. 2024.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