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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行人) -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行人) - 한용운​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 2024. 9. 10.
돌계단 - 나태주 돌계단 - 나태주 ​​네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돌계단 하나에 석등이 보이고 돌계단 둘에 석탑이 보이고 돌계단 셋에 극락전이 보이고 극락전 뒤에 푸른 산이 다가서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돛을 달고 마악 떠나가려 하고 있었지 ​하늘이 보일 때 이미 돌계단은 끝이 나 있었고 내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오르던 너는 이미 내 옆에 없었지 ​훌쩍 하늘로 날아가 흰구름이 되어버린 너! ​우리는 모두 흰구름이예요, 흰구름 육신을 벗고 나면 이렇게 가볍게 빛나는 당신이나 저나 흰구름일 뿐이에요 너는 하늘 속에서 나를 보며 어서 오라 손짓하며 웃고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어 땅에서 울고 있었지 발을 구르며 땅에 서서 울고만 있었지. 2024. 9. 10.
아기의 꿈 - 주요한 아기의 꿈 - 주요한​벌써 어디서 다드미 소리가 들린다.별이 아직 하나밖에 아니 뵈는데,달빛에 노니는 강물에 목욕하러색시들이 강으로 간다.​바람이 간다. 아기의 졸리는 머릿속으로.수수밭에 속삭이는 소리를아기는 알아 듣고 웃는다.​아기는 곡조 모를 노래로 대답한다.어머님이 아기 잠을 재우려 할 적에​어머님의 사랑하는 아기는이제 곧 잠들겠습니다.잠들어서 이불에 가만히 뉘인 뒤에몰래 일어나 아기는 나가겠습니다.나가서 저기 꿈 같은 흰 들길에서그이를 만나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그러면, 어머님은 아기가 잘도 잔다 하시고,다림질할 옷을 풀밭에 널러아기의 웃는 얼굴에 입맞추고 나가시겠지요.​그럴 적에 아기는 앞 강을 날아 건너그이 계신 곳에 가 보겠습니다.가서 그이에게 어머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2024. 9. 10.
8월의 바다 - 이채 8월의 바다 - 이채 ​​​8월의 바다 그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그리고 헤어졌을까​넘실대는 파도에 하얗게 이는 물보라 그 물보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밀려오고 그리고 쓸려 갔을까 ​그래서 겨울바다는 늘 쓸쓸한가 보다 ​8월의 바다 그 바다 저편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숲으로 떠 있는 외로운 섬 하나 ​하얀 갈매기 날으고 구름도 쉬어가는 그곳 그곳에 혹시 보고픈 연인이라도 머물고 있지나 않을까 ​그래서 그 섬은 늘 그리운가 보다​ 2024. 9. 10.
바다 - 윤동주 바다 - 윤동주 ​​실어다 뿌리는 바람조차 시원타.솔나무 가지마다 새촘히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밀치고밀치운다.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오른다.해변(海邊)에 아이들이 모인다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바다는 자꾸 설워진다.갈매기의 노래에.....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돌아가는 오늘의 바다여!​ 2024. 9. 10.
청자부(靑磁賦) - 박종화 청자부(靑磁賦) - 박종화​선(線)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사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陰影)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翡翠)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 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 무늬, 물결 무늬, 구슬 무늬, 칠보 무늬, 꽃 무늬, 백학白鶴) 무늬, 보상화문寶相華紋), 불타(佛陀) 무늬, 토공(土工)이요 화가더라. 진흙 .. 2024. 9. 6.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세월이 가면 - 박인환​​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2024. 9. 6.
비 오는 날 아침 - 이해인​ 비 오는 날 아침 - 이해인​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빗소리에 잠이 깨었네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나를 부르네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작은 욕심도 줄이라고정든 땅을 떠나 힘차게날아오르라고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진정 아름다운 삶이란떨어져 내리는 아픔을끝까지 견뎌 내는 겸손이라고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서로를 적셔 주는 기쁨이라고 2024. 9. 6.
고향 - 정지용 고향 - 정지용​​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진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힌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2024. 9. 6.
박꽃 - 신대철 ​ 박꽃 -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침을 감춘 채뜬소문도 잠들고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박꽃이 핀다​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2024. 9. 6.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아직 아무도 해(害)안 일 없는 새로 뽑은 독(毒)벗은 그 무서운 독(毒)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나는 그 독(毒)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독(毒)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허무(虛無)한디!' 독(毒)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나는 독(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마금날 내 외로운 혼(魂)건지기 위하여 2024. 9. 5.
8월의 기도 - 임영준 8월의 기도 - 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고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2024.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