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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내가 아닌 누군가 오래 방 안에 누워 있다가 간 느낌이웃이거니 생각하고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의 주인은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바닥에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 2024. 8. 28.
나의 노래는​ - 신석정​ 나의 노래는​ - 신석정​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바람 속에 있다​나의 노래는​너의 타는 눈망울과​그 뜨거운 가슴속에 있다​​나의 노래는​저어 빨간 장미의 산홋빛 웃음 속에 있다​나의 노래는​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속에 있다​​​나의 노래는​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나의 노래는​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 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나의 노래는​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나의 노래는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2024. 8. 28.
서시 - 이정록​ 서시 - 이정록​마을이 가까울수록나무는 흠집이 많다​내 몸이 너무 성하다​ 2024. 8. 28.
섬진강 3 - 김용택 섬진강 3 - 김용택​그대 정들었으리지는 해 바라보며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깊이깊이 잦아지니그대, 그대 모르게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풀씨도 지고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풀잎에 마음 기대며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돌아오는 저녁 길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눈 익어 정들었으니이 땅에 정들었으리더 키워 나가야 할사랑 그리며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그대 야윈 등,어느덧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2024. 8. 28.
섬진강 5/삶 - 김용택​ 섬진강 5/삶 - 김용택​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버릴 것 다 버리고버릴 것 하나 없는가난한 눈빛 하나로어둑거리는 강물에가물가물 살아나밤 깊어질수록그리움만 남아 빛나는별들같이 눈떠 있고,짜내도 짜내도기름기 하나 없는짧은 심지 하나강 깊은 데 박고날릴 불티 하나 없이새벽같이 버티는마을 등불 몇 등같이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새벽 강물에눈곱을 닦으며,우리 이렇게그리운 눈동자로 살아이 땅에 빚진착한 목숨 하나로우리 서 있을 일이다​ 2024. 8. 28.
시절인연 - 이찬원 시절인연 - 이찬원 사람이 떠나간다고그대여 울지 마세요오고 감 때가 있으니미련일랑 두지 마세요좋았던 날 생각을 하고고마운 맘 간직을 하며아아아 살아가야지바람처럼 물처럼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때가 되면 찾아올 거야새로운 시절인연친구가 멀어진다고그대여 울지 마세요영원한 것은 없으니이별에도 웃어주세요좋았던 날 생각을 하고고마운 맘 간직을 하며아아아 살아가야지바람처럼 물처럼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때가 되면 찾아올 거야새로운 시절인연새로운 시절인연사람이 떠나간다고그대여 울지 마세요 2024. 8. 27.
비망록(備忘錄) - 문정희 비망록(備忘錄) - 문정희​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가난한 식사 앞에서기도를 하고밤이면 고요히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2024. 8. 27.
섬진강 17/동구 - 김용택 섬진강 17/동구 - 김용택​추석에 내려왔다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차비나 혀라― 있어요 어머니철 지난 옷 속에서꼬깃꼬깃 몇 푼 쥐어 주는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고개 숙여 텅 빈 들길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서울 길 삼등 열차동구 정자나무 잎 바람에 날리는쓸쓸한 고향 마을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공사판 모닥불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눈에 선하다고불길 속에 선하다고고향 마을 떠나올 때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눈에 선하다고강 건너 콩동이랑들판 나락 가마니랑누가 다 져 날랐는지요 아버님불효자식 올림이라고불.. 2024. 8. 27.
섬진강 18/나루 - 김용택 섬진강 18/나루 - 김용택​섬진강 나루에 바람이 부누나꽃이 피누나나를 스쳐 간 바람은저 건너 풀꽃들을천 번 만 번 흔들고이 건너 물결은 땅을 조금씩 허물어풀뿌리를 하얗게 씻는구나고향 산천 떠나보내던 손짓들배 가던 저 푸른 물 깊이 아물거리고정든 땅 바라보며눈물 뿌려 마주 흔들던 설운 손짓들 두고꽃길을 가던 사람들지금 거기 바람이 부누나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뱃길뱃전에 부서지며 갈라지던 물살을 보며강 건너 시집간 누님도 객지로 가고공장 간 누이들은 소식도 없다가남편 없는 아기 엄마 되어밤배로 몰래 찾아드는타향 같은 고향 나루그래도 천지간에 고향이라고이따금 꽃상여로 오는 사람들빈 배가 떠 있구나기쁜 일 슬픈 일 제일 먼저숨 가쁜 물결로 출렁이던섬진강 나루에지금도 물결은 출렁이며설운 가슴 쓸어그리움은 깊어.. 2024. 8. 27.
나무 - 김용택​ 나무 - 김용택​​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봄이었어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여름이었어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가을이었어나, 그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강물에 눈이 오고 있었어강물은 깊어졌어한없이 깊어졌어​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다시 봄이었어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지그냥,있었어​ 2024. 8. 27.
가을 무덤-祭亡妹歌 - 기형도 가을 무덤-祭亡妹歌 - 기형도​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우리는신경(神經)을 앓는 중풍환자(中風病者)로 태어나전신(全身)에 땀.. 2024. 8. 27.
땅에서 - 김용택 땅에서 - 김용택​그대가 보고 싶을 때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저무는 강으로 갑니다소리 없이 저물어 가는물 가까이 저물며강물을 따라 걸으면저물수록 그리움은 차올라출렁거리며 강 깊은 데로 가강 깊이 쌓이고물은 빨리 흐릅니다그대여더 저물 길이 막혀내 가만히 숨 멈춰두려움으로 섰을 때문득 저물어 함께 떠나는저기 저 물과 소리아, 오늘은 나도 몰래어제보다 한 발짝 먼 데까지저물어 섰는나를 보겠네 땅을 보겠네발밑 우리 땅을 보겠네알겠네 그대여사랑은 이렇게 한 발짝씩 늘려우리 땅을 얻는 기쁨이라고사랑은 이렇게저렇게 저녁 노을 떠나가는아름다운 하늘 아래저 푸른 물결 와 닿는우리 땅을 찾아우리 땅에 들어서는설레는 가슴이렇게 한없이 떨리는 기쁨이라고그대여그대 어두워 발 다치는 저문 강 길로저물어 와 우리 같이 설 때까지나.. 2024.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