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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춤 - 신석초​ 바라춤 - 신석초​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러 했건만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어이할까나.​​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경경(耿耿)히 밝은 달은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뒤안 이슥한 꽃가지에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저리 슬피 우는다.​​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무상한 열반(涅槃)을나는 꿈꾸었노라.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몸은 설워라.허물 많은 사바(娑婆)의 몸이여.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내 보석 수풀 속에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의끝없는 갈림길이여.​​구름으로 잔잔히흐르는 시냇물 소리지는 꽃잎도 띄워둥둥 떠내려가것다부서.. 2024. 9. 19.
플라타너스 - 김현승 플라타너스 - 김현승​​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플라타너스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먼 길에 올 제,호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이제 너의 뿌리 깊이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플라타너스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플라타너스너를 맞아줄 검은 훍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는냐?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2024. 9. 19.
오동꽃 - 이병기 오동꽃 - 이병기​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나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 2024. 9. 13.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아침 저녁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 2024. 9. 13.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 오규원​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마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2024. 9. 13.
가을 서한 - 나태주​ 가을 서한 - 나태주​1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종이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2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양식.​3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꽃씨 몇 옴큼,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소리,​4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우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때묻은 와이셔츠 깃​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 빛한 초롱.​​ 2024. 9. 13.
9월의 시 - 문병란 9월의 시 - 문병란​​9월이 오면해변에선 벌써이별이 시작된다나무들은 모두무성한 여름을 벗고제자리에 돌아와호올로 선다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기도를 마친 여인처럼고개를 떨군다울타리에 매달려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먼 항구에선벌써 이별이 시작되고준비되지 않은 마음눈물에 젖는다 2024. 9. 13.
깊은 물 - 도종환 깊은 물 - 도종환​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굽이 많은 이 세상 이 시냇가 여울을​ 2024. 9. 12.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1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2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내게는 아모 것도 두려움 없어,육상(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3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나.. 2024. 9. 12.
이쯤에서 - 신경림 이쯤에서 - 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 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 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 2024. 9. 12.
9월이 오면 들꽃으로 피겠네 - 이채 9월이 오면 들꽃으로 피겠네 - 이채​​9월이 오면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겠네 보일 듯 말 듯 피었다가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인 혼자만의 몸짓이고 싶네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산 너머 구름으로 살다가 들꽃 향기에 실려 오는 바람의 숨결 끝내 내 이름은 몰라도 좋겠네 ​꽃잎마다 별을 안고 피었어도 어느 산 어느 강을 건너왔는지 물어보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서글프지만은 않네 ​9월이 오면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겠네 알 듯 모를 듯 피었다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혼자만의 눈물이고 싶네​ 2024. 9. 12.
벼 - 이성부​​ 벼 - 이성부​​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2024.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