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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26/밤꽃 피는 유월에 - 김용택​ 섬진강 26/밤꽃 피는 유월에 - 김용택​어이, 이 사람자네 죽어 밤꽃 피는 유월의 산거기 둥그렇게 잠들더니내 죽어 밤꽃 피는 유월의 산여기 묻혀살아서나 죽어서나우리 서로 바라보겠네여기 나서 자라 농사지으며 늙어죽을 때까지자네 그 산 거기 나무하고 풀하고곡식 뿌려 거두며어이! 담배 한 대 태우고 일허세,어이! 쉬었다 허세,서로 부르면감나무 아래 밭가 바위에 앉아땀 식히고 담배 태우며숨 몰아쉬고서로 바라보다 다시 일허고해 저문 징검다리에서 만나면헌 삼베 등지기 땀에 젖어 쉰내 나고지게 위에 수북하던 풀과 나무자네 나뭇짐 하나는 참으로감자 먹고 똥 싼 것처럼 고왔고내 바작 풀 하나는 고봉밥처럼 잘도 쌓았지우리 징검다리 하나씩 차지허고웃통 벗어 몸 씻을 때서로 보던 자네 몸과 내 몸에푸르게 멍든 지게 자국죽으.. 2024. 8. 26.
방문객 - 정현종​ 방문객 - 정현종​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2024. 8. 26.
먼 행성 - 오민석 먼 행성 - 오민석​벚꽃 그늘 아래 누우니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연민을 가르쳐 준 궁핍의 가시들오지 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 준 당신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잘린 체 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늦은 밤의 술 약속과돌아와 써야 할 편지들과잊힌 무덤들 사이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벚꽃 아래 누우니꽃잎마다 그늘이고그늘마다 상처다다정한 세월이여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2024. 8. 26.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그 여자네 집 - 김용택​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생각하면 그리웁고바라보면 정다웠던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살구꽃이 피는 집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물을 길어 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싶은 집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그 여자아버지와 그 여자큰오빠가지붕에 올라가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노란 초가집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 2024. 8. 26.
길에서 - 김용택 길에서 - 김용택​앞산 뒷산오월 푸른 산을 바라보건대그 사이 앞내가 푸르르고그 안에 살아온 내 몇 해가하루해 같아오늘 해는 유난히 짧고해 지는 산마루에 눈물이 걸려반짝 비치는구나무엇을 아끼고무엇에 정 붙여 살았느냐맑은 바람은 이리 부드럽게야윈 뺨을 스치는데내게 오고 가고 무엇이 머무느냐생각하면 누구나 살아온 이 세상이피눈물을 쏟던 설운 굽이인데찔레꽃 떠내려가는어느 물굽이에서내 서러움만 가려서떠 보이겠느냐철이 들면서 나는앞산 빈 밭 거름 더미만 보아도 정에 겨웠고홀로 밭매는 어머니만 먼 데서 보여도밭이 너무 커서 서러웠다어디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저녁 길동구에 들어서서어머님 등불만 보여도나는 늘 가슴이 새롭게 뛰고발길이 부산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어머니, 부르며 마당에 들어서면오냐 내 새끼 인자 오냐, 문.. 2024. 8. 23.
사랑 - 김용택 사랑 - 김용택​당신과 헤어지고 보낸지난 몇 개월은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답답했습니다​허지만 지금은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생각해 보고 있습니다​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어찌하지 못합니다​계절이 옮겨 가고 있듯이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 가기를바라고 있습니다​​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어디선가 또새 풀이 돋겠지요​이제 생각해 보면당신도 이 세상의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한 사람이었습니다​당신을 잊으려 노력한지난 몇 개월 동안아픔은 컸으나참된 아픔으로세상이 더 넓어져세상만사가 다 보이고​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 2024. 8. 23.
꽃산 찾아가는 길 - 김용택​ 꽃산 찾아가는 길 - 김용택​오늘도 나는 당신 속에 저뭅니다. 당신을 찾아 나선 이 화창한 긴긴 봄날 긴긴 해 다 질 때까지 당신을 찾아갑니다. 당신을 찾아가는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물 막히면 물 건너고 산 막히면 산 넘듯, 당신 늘 꽃 펴 있다는 그리움 하나로 이겨 갑니다. 가다가 가다가 해 저물면 산 하나 되어 산속에 깃들었다가 해 떠 오면 힘내어 갑니다. 당신 만나 환히 꽃 필 저기 저 남산은 꽃 없는 쓸쓸한 산 아니라 해맑은 해 어디나 돋는 나라, 눈 주면 늘 거기 꽃 피는 당신 찾아 오늘도 지친 이 몸 당신 찾아가다가 저녁 연기 오르는 마을 저문 산속에 산 되어 깃듭니다. 2024. 8. 23.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그래서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 2024. 8. 23.
안개 - 기형도 안개 - 기형도1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2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멀리 송전탑.. 2024. 8. 23.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이별은 손끝에 있고서러움은 먼 데서 온다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아침 산그늘 속에산벚꽃은 피어서 희다누가 알랴 사람마다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슬픔은 손끝에 닿지만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저문 산 아래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2024. 8. 22.
꽃등 들고 임 오시면 - 김용택 꽃등 들고 임 오시면 - 김용택​긴 어둠을 뚫고새벽닭 울음소리 들리면김 나는 새벽 강물로꽃등 들고 가는흰옷 입은 행렬을 보았네때로 흐를 길이 막히고어쩔 때 부서져도흘러온 길이 아득하고흐를 길이 멀고 멀다면흐르는 일이야 우리 얼마나행복한 일이랴범람하여 헛된 땅 메우고우리 땅 되살리며꽃등 들어 임의 얼굴 비춰 보며​ 2024. 8. 22.
섬진강 2 - 김용택 섬진강 2 - 김용택​저렇게도 불빛들은 살아나는구나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불빛은 살아나며산은 눈뜨는구나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섬진강 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 내리고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 내며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은강물에 가져다 버린다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아침이 올 때까지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이른 아침 어느새너는 물동이로 얼음을 깨고물을 퍼 오는구나아무도 모르게하나 남은 불송이를물동이에 띄우고하얀 서릿발을 밟으며너는 강물을 길어 오는구나참으로 그날이 와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 나고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임을 향해 굳구나 2024. 8. 22.